세종대왕의 아들 19명
— 왕좌를 두고 형제가 형제를 죽인
조선 최대의 비극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꼽히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들들이 어쩌다 왕좌를 둘러싸고 피를 나눈 형제끼리 칼을 겨누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오늘은 세종대왕의 아들들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숫자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세종대왕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포함해 11명의 처와 첩에게서 아들 19명, 딸 7명, 총 26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 중 정비 소헌왕후 소생이 8남 2녀로 가장 많았고, 후궁 신빈 김씨 소생이 아들만 6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식복만큼은 조선 어느 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세종이 이 많은 아들들을 낳을 때 극심한 당뇨와 두통, 이질, 시력 저하 등 수많은 병을 달고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앉아 있는 종합병원"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몸이 성하지 않았던 군주가 19명의 아들을 남겼으니, 어쩌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 세종대왕이 두 아들 문종(오른쪽)·수양대군(왼쪽)과 함께 경복궁을 거닐고 있다. (AI 생성 상상화)
아들들의 이야기
세종의 장남 문종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왕이었습니다. 학문에 뛰어났고,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으며, 32년이라는 긴 세자 기간 동안 대리청정을 맡아 국정을 충실히 익혔습니다. 모든 면에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세종은 살아생전부터 이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문종이 너무 병약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문종은 즉위한 지 불과 2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아들 단종만 남겨두고요. 세종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훗날 세조는 형 문종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학문보다는 무예에 능했고, 키가 175~180cm로 당시로선 장신이었으며, 결단력과 야심이 넘쳤습니다.
세종은 살아있을 때부터 이 둘째 아들의 야심을 눈치채고 궁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문종마저 요절하자 어린 단종이 즉위했고,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킵니다. 자신의 친동생 안평대군을 포함해 정적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그는 자신의 권력에 끝까지 저항한 동생 금성대군마저 사사했고, 조카 단종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찬란한 아버지 세종의 유산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가장 비정한 방식으로 권력을 쥔 아들이었습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서예, 시문, 그림, 가야금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탄생한 것도 안평대군이 꾼 꿈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만큼 정치적 야심도 컸습니다. 어린 단종을 보호하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정적으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된 뒤, 불과 8일 만에 사사되었습니다. 나이 36세. 세조는 안평대군이 남긴 수많은 작품과 글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 많은 예술적 업적이 역사 속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세조에 맞선 마지막 저항의 상징입니다. 계유정난 이후 여러 차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유배를 당했고, 경상도 순흥 유배지에서 다시 한번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조가 후에 적극 지원한 수종사(水鍾寺)는 바로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절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인 동생이 만든 사찰에서 세조는 불공을 드린 셈입니다.
그 외 아들들 — 빛과 그림자 사이
세종의 아들 중 전란 없이 비교적 평탄하게 살다 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넷째 임영대군은 무예와 총통 제작에 능했고 검소하고 교만하지 않아 세종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막내 영응대군은 글씨와 그림, 음률에 뛰어나 아버지 세종의 총애가 남달랐습니다.
반면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은 어린 나이에 요절해 세종과 소헌왕후를 큰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두 아들을 잇달아 잃은 세종은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명복을 빌었고, 아내 소헌왕후마저 세상을 떠나자 훈민정음으로 찬불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었습니다.
병약한 문종이 일찍 죽을 것 같다는 것, 그리고
야심 있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어린 손자 단종을
위협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 세종대왕이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장면. 왼쪽 수양대군, 오른쪽 문종이 함께하고 있다. (AI 생성 상상화)
세종이 가장 걱정했던 것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인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손자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거듭 남겼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세종의 걱정대로 흘러갔고, 그가 아낀 신하들조차 반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결말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어쩌면 업적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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