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슬러 조선의 기록 속을 들여다보면, 언뜻 믿기 어려운 미스터리들이 겹겹이 얽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흔적이 말없이 사라진 실종 사건들은 오늘날까지도 해석되지 않은 채 역사의 그림자 속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공식 역사 기록으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들은 당시 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제도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표적인 실종 사건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실록에 등장하는 유유라는 인물은 가문의 갈등 속에서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또다시 흔적을 감춥니다. 누가 진짜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을까요. 단종의 실록은 아예 역사의 장에서 삭제되어, 왕조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는 정치적 침묵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장영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렸던 천재는 어느 날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면 침묵이 그려낸 단단한 벽만이 남습니다. 이들은 단지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의도와 권력이 지워낸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이 기록들을 마주해야 할 이유는, 단지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진실을 다시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유유 실종 사건 – 형제의 그늘 속에 사라진 자, 그리고 진실을 지운 침묵
조선 중기의 어느 날, 대구의 한 양반가에서 자취를 감춘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유유. 현감을 지낸 아버지 유예원의 둘째 아들로, 세간에서는 ‘심질’이라 불리던 정신적 고통과 가족 간 갈등 속에서 결국 문을 닫고 집을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1556년의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불화, 부부간의 냉랭함, 무엇보다도 병든 내면이 그를 어디론가 데려간 듯했습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은 걱정과 해묵은 오해, 그리고 묘한 침묵뿐이었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그를 잊어가고 있을 무렵,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유가 해주에서 ‘채응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찾아낸 이는 세종대왕의 외가와 인연 있는 왕족이자 유유의 자형, 달성군 이지였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던 그곳에서 유유는 첩 춘수와 아들까지 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분주히 움직였고, 동생 유연 역시 “형이 돌아왔다”는 기대를 품고 해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연이 마주한 형은, 기억 속의 그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작고 누르스름한 얼굴, 가늘고 부드럽던 음성이 사라진 자리에, 검게 그을린 수염투성이에 목소리조차 쩌렁쩌렁한 낯선 사내가 있었습니다. 유연은 그를 유유가 아닌 가짜라고 확신했고, 노비를 시켜 포박한 뒤 관아로 끌고가 수령에게 진위를 가려달라 요구했습니다. 채응규는 감옥 안에서 “내가 유유다”라며 아내 백씨와의 첫날밤 이야기까지 꺼내며 자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정작 결정적 증인이 되어줄 백씨는 유유를 직접 만나지도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채응규가 감쪽같이 감옥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진짜 유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수군거렸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첩 춘수와 아내 백씨가 돌연 “유연이 형을 살해했다”고 고발장을 냅니다. 가족 간의 실종 사건은 이제 사기극, 나아가 살인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조선의 ‘균분상속’과 ‘장자우대’라는 제도적 전환기의 정중앙에서, 유유는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선 상징이 되었습니다.
유예원은 생전에 막내 유연에게 재산 일부를 먼저 상속한 바 있습니다. 유유가 살아 돌아올 경우 상속 분배가 뒤바뀔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이는 유연뿐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불편한 변수였습니다. 유유의 귀환은 단순한 가족 상봉이 아닌, 모두의 이해관계를 흔드는 ‘사건’이었고, 동생 유연은 결국 살인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가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유교의 나라. 형을 죽인 이는 ‘강상죄’에 해당하며, 이는 국왕이 직접 사형을 명하는 중죄였습니다. 사건은 조선 3대 사법기관인 의금부, 의정부, 사헌부가 모두 참여하는 '삼성추국'으로 확대됐고, 임금과 대신들이 사건의 진위를 놓고 직접 논쟁에 나설 만큼 민감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 후, 당대의 석학 이항복은 유연의 시점에서 이 사건을 재구성한 <유연전>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것이 억울한 형의 죽음을 가리기 위한 글쓰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유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였든 아니든, 유유라는 이름은 그렇게 조선 사회의 어두운 골목에 사라졌습니다. 진실이란, 때로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 앞에 침묵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출처: 권내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 너머북스, 2021 / 한겨레신문, “조선시대 살인사건으로 비화한 유유의 가출”, 2021-07-02)
단종 실록 삭제 사건 – 기록에서 지워진 왕, 잊힌 진실의 비명
역사는 기억의 집이라지만, 어떤 이는 그 집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조선의 6대 왕, 단종은 바로 그 ‘기억에서 지워진 왕’입니다. 그는 왕좌에 오른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숙부 수양대군, 훗날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를 당합니다. 그러나 단종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 나아가 그의 존재 자체는 국가의 공식 기록에서조차 ‘삭제’되었습니다.
《세조실록》은 1457년 10월 21일자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금성대군과 송현수의 복위 시도가 발각된 뒤, 충격을 받은 단종이 스스로 생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단 한 줄의 문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로 진실을 가립니다.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이 차분한 문장 속에는 어떠한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오직 권력이 원한 대로 정제된 ‘기록의 침묵’만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실제로 단종의 죽음을 직접 언급하는 명확한 사료는 없고, 사약을 내렸다는 흔적조차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왕명을 받았다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이름조차 《세조실록》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00년 가까이 흐른 뒤, 숙종 25년(1699년)의 《숙종실록》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했으나 차마 명을 집행하지 못했고, 항상 단종 곁을 지키던 한 유생이 스스로 나서 단종을 목 졸라 죽였다는 것입니다. 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고 죽었다는 서늘한 묘사—이것이 더 늦게 기록된 ‘또 다른 진실’입니다.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처절한 묘사는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등장합니다. 거기서 단종은 곤룡포를 차려입고 활줄로 이어진 긴 끈에 목이 졸립니다. 이때 시종들과 시녀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졌고,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시체들로 물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날은 마치 하늘도 울분을 토하듯 천둥번개가 휘몰아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정사의 한 줄이 남긴 '자살'이라는 표현 아래에는 이처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피맺힌 절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장례입니다. 《세조실록》은 단종을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기록하지만, 실은 단종의 시신은 강가에 버려졌고, 시신을 수습한 자는 누구라도 삼족이 멸해질 위기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영월의 하급 관리 엄흥도는 명을 거스르고 한밤중 시신을 몰래 수습해 자기가 모시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관에 염을 하고 묻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 무명의 충절은 이후 단종이 복권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고, 그는 죽은 뒤 공조판서로 추증됩니다.
단종의 무덤 ‘장릉’은 본래 왕릉의 금도라 불리던 한양 100리 안에 있지 않고, 예외적으로 멀리 영월에 있습니다. 1698년 숙종이 단종을 정식 왕으로 복권시키며 ‘장릉’이라는 능호를 하사했고, 이후 지관들이 왕릉을 이장하려 했지만, 이미 단종이 잠든 자리는 ‘천하의 명당’이라 하여 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왕의 이름은 그저 실록 몇 줄로만 남겨질 수 없습니다. 영월 주민들은 단종을 산신령처럼 여겼고, 장릉 인근에서는 지금도 어린아이조차 단종의 묘 앞에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지워진 기록 속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 이름이 적혀 있는 듯 말입니다.
역사는 기록의 기술이자, 때로는 삭제의 기술입니다. 단종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을 지우는 것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무서운 일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장영실 실종 사건 – 천재의 그림자가 사라진 날, 침묵만이 과학을 묻었다
그는 신분을 넘어선 재능의 화신이었습니다. 조선의 하늘을 측량하고, 시간을 재고, 천체를 관측하며 나라의 기둥이 된 사내, 장영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종은 그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보았고,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를 곁에 두었습니다. 간의, 앙부일구, 자격루, 혼천의…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기계들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과학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정밀하고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토록 빛났던 한 사람의 이름을, 어느 날 갑자기 역사에서 지워버립니다. 장영실은 ‘사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분명 세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42년 이후 장영실에 대한 공식 기록은 돌연 끊깁니다.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조선이라는 기록의 나라, 모든 것을 남기는 사서의 나라에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한 채 수백 년을 흘려보냈습니다.
후대의 야사들은 몇 가지 설을 전합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임금의 가마를 손상시킨 죄'입니다. 어느 날 세종이 타고 있던 가마가 부서졌고, 그 책임을 물어 장영실이 관직에서 파직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아 세종이 가장 아끼던 신하를 단순한 기술적 사고 하나로 버렸을 것이라는 설명은 너무 단순하고, 어딘가 납득되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오히려 정적들의 질투, 유학자들의 계급 차별적 시선, 사대부 중심 질서에서 그가 점점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장영실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틀을 깨는 존재였습니다. 기술자였고, 창조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신분의 벽을 넘어선 선구자였습니다.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기술’은 천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과학’은 철학보다도, 문학보다도 아래로 취급되던 시대였습니다. 천민 출신의 장영실이 정3품 벼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의 수많은 발명품들이 세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실용성과 정확성이 입증된 과학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이 사라진 후 조선의 과학은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이 그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과학의 미래마저 접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는 장영실이 사망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은퇴하거나 유배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그가 몰래 명나라로 망명하여 기술을 이어갔을 것이라고도 추정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아마도 그 자신도 모르게 ‘정치’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 갇혀 부서졌을지도 모릅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보호막이 사라진 장영실은 결국 혼천의처럼 천체 위로 멀어져간 이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과학의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권력의 이름으로 역사는 그를 지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만든 해시계 아래에서 시간을 읽고, 그가 측정한 하늘 아래서 별을 바라보며, 오히려 더 묻습니다. “왜 그는 사라져야 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침묵 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그의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상상과 의혹과… 깊은 안타까움뿐입니다.
잊힌 이름들, 남겨진 이야기들 – 기록되지 못한 진실의 무게
조선은 철저한 기록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충직했던 이들은 가장 먼저 지워졌습니다. 실록은 방대했지만, 그 속에 다 담기지 못한 삶들이 있었습니다. 가문의 그림자 속에서 실종된 유유, 정적의 손에 쓸려나간 단종, 과학이라는 이름의 혁신을 감당하지 못한 체제가 외면한 장영실. 이 세 사람은 단지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체제와 권력이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지우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그들이 사라진 이유는 모두 달랐습니다. 유유는 혈육 사이의 균열과 제도의 경계에서 흔들렸고, 단종은 정권이라는 이름 아래 생을 마감했으며, 장영실은 신분과 시대의 틀을 깨기엔 너무 앞서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공통으로 겪은 것은 ‘침묵’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행방이, 이름이, 목소리가, 시대 전체의 선택 아래 묻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그들을 다시 이야기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워진 이름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행위입니다.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는 건, 그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는, 어떤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가?"
기록은 지워질 수 있어도, 기억은 살아남습니다. 침묵은 있었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그 이름들을 말하는 순간, 잊힌 진실은 다시 숨을 쉽니다. 그리고 그 숨결 위에서, 역사는 다시 쓰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에도 말없이 떠오른 그 이름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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