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린 밖의 진짜 이야기/📘 이야기,전설,미스터리 아카이브

고려 역사 최대의 미제 사건, 저고여 피살의 모든 것

by K-Movie 아카이브 2025. 4. 10.
반응형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된 몽골 사신 저고여와 고려-몽골 외교 갈등을 묘사한 역사적 장면
이 이미지는 1225년 압록강 인근에서 발생한 저고여 피살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고려와 몽골 간의 긴장감 넘치는 외교 갈등과 여몽전쟁의 서막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여몽전쟁의 도화선, 저고여 피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1225년 음력 1월 22일,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제국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인근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신 암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몽골의 고려 침공, 즉 여몽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몽골은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며 외교적으로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고, 고려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저고여는 몽골의 위임을 받고 몇 차례 고려를 방문했으며, 거듭된 오만한 태도와 무례한 행동으로 고려 조정과 민심 모두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압록강을 넘어 귀국하던 중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피살되었고, 이로 인해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준비했고, 이 사건은 단일 사건으로는 그 영향력이 가장 컸던 외교적 참극으로 평가받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첫 접점, 거란 유민 사태와 강동성 전투

대요수국과 거란 유민의 남하

1216년, 거란족의 후예들이 고려로 침입하며 양국 간의 군사 충돌이 시작됩니다. 이들은 금나라에서 독립한 야율유가, 야율시불 형제를 중심으로 대요국과 후요국을 세우고 몽골과 대립했습니다. 야율시불은 몽골 사절단 300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결국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야율금산과 금시는 몽골과 금의 협공을 피해 고려로 도피했고, 고려는 이 세력의 침공에 대응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218년, 고려는 몽골과 연합하여 거란 잔당을 강동성에 몰아넣고 격파합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고려와 몽골이 군사적 협력을 이루게 되었고, 이후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걱댄 '형제의 맹약'

형식적인 맹약과 달리, 몽골은 무례한 외교 태도와 강압적인 공물 요구를 이어갔고, 고려의 실권자 최우는 이에 반감을 품었습니다. 특히 사신 포리대완은 고려 국왕 고종의 손을 붙잡는 등,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외교적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는 두 나라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몽골 사신 저고여, 반복되는 행패로 결국 피살되다

무례한 외교, 불만에 찬 민심

1221년과 1224년, 저고여는 고려를 반복 방문하며 무리한 요구와 모욕적인 언행을 이어갑니다. 공물을 바닥에 내던지거나, 고려 왕 앞에서 선물 보따리를 던져보이는 등 외교관으로서의 태도라기보다는 깡패 같은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더욱이 그가 고려에 요구한 공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수달 가죽 1만 장, 고운 주단 3,000필 등 당시 고려의 재정을 크게 압박하는 수준이었으며, 심지어 그가 받은 공물 중 일부는 국경 근처에 다 버리고 수달 가죽만 챙겨가는 모욕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피살의 순간, '도적에게 살해당했다'?

​ 1225년 1월, 저고여는 공물을 챙겨 귀국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살됩니다.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사건 직후 몽골은 고려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즉각 이를 부인하고 금나라 잔당인 우가하(于加下)의 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로 인해 고려와 몽골의 외교는 단절되었고, 6년 후인 1231년 몽골군은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저고여 피살 사건과 여몽전쟁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고려와 몽골 간의 외교 갈등 이미지
이 이미지는 1225년 발생한 저고여 피살 사건과 이를 계기로 촉발된 여몽전쟁의 전개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일러스트입니다. 고려와 몽골 간의 외교적 긴장과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의문점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용의자 1: 고려 최우

몽골의 공식 입장은 고려가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최우는 당시 고려의 실권자로서 저고여를 죽일만한 동기도 있었고, 실제 1232년에는 서경에 있던 다루가치 72명을 몰살하는 사건도 벌인 인물입니다. 그의 대몽강경 노선과 감정적인 외교 행태를 볼 때, 저고여 암살을 명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직접적인 사료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려사》나 《동사강목》 등에서도 해당 사건에 대해 최우의 직접 개입을 언급하지 않으며, 이는 고려 내부적으로도 불명확하거나 고의로 숨겨진 기록일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용의자 2: 금나라 잔당, 우가하

고려는 공식적으로 금나라 잔당 우가하의 소행이라 주장했습니다. 몽골 사절단이 원래 통과해야 할 동하 지역이 아닌 금나라의 파속로(婆速路)를 경유해 왔기 때문에,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우가하가 저고여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입니다.

당시 우가하는 몽골의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리며 벼랑 끝에 몰린 상태였습니다. 몽골과 고려를 이간질해 전선을 분산시키고자 했던 시도였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직접적 증거는 없으며, 정치적 해명을 위한 외교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

 

용의자 3: 동하(포선만노)

국내 학계에서 가장 가능성 높게 보는 범인은 동하(東夏)의 군벌 포선만노입니다. 그는 1221년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독자적인 수교를 고려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저고여 피살 사건 이후, 1225년부터 1229년까지 수차례 고려를 침공하며 보복성 공격을 감행합니다.

게다가 몽골 사절단은 평소 통행하던 동하가 아닌 금나라 경로를 택했는데, 이는 몽골이 이미 동하의 반역 가능성을 인지하고 피하려 한 정황으로도 해석됩니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할 때 동하의 보복 또는 이간질 시도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용의자 4: 몽골 제국 (자작극설)

근래에는 이 사건이 몽골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고려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자국 사신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설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실제 침공은 저고여 피살로부터 무려 6년 후에나 이루어졌고, 당시 몽골은 서하 원정 중이었습니다.

또한, 몽골은 전통적으로 침공 명분보다는 힘을 앞세우는 유목국가였으며, 전략상 고려를 속국으로 삼는 것이 목적이었지, 굳이 자국 사신을 죽이면서까지 전쟁을 벌일 이유가 희박합니다. 따라서 이설은 주류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낮은 주장으로 간주됩니다.

 

결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제 사건, 그 여운

저고여 피살 사건은 단순한 사신 암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30년간 지속된 여몽전쟁의 기폭제였으며, 결과적으로 고려 역사 전체의 향방을 바꿔놓은 중대사건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결정적 단서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려, 금나라, 동하 등 모두 동기를 가질 만한 정황이 존재하지만, 정황만으로는 명확한 진실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사건 직후의 정세 변화와 이후 포선만노의 행동을 볼 때, 국내 학계에서는 동하가 범인일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외교 관계 실패 → 암살 → 보복 공격이라는 일련의 흐름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저고여 피살 사건은 범인도, 배후도, 진상도 모두 미궁 속에 남은 채, 한국사에서 가장 극적인 외교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하나로 인해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