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 여행: 내 청춘의 70년대 국민학교로 가다
혹시 여러분도 꿈속에서 그 시절로 돌아간 적이 있으신가요? 난로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도시락, 콩나물 시루 같았던 교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종이 딸랑딸랑 울리던 그 소리까지요. 제게 1970년대 국민학교는 지금 생각해봐도 참 특별한 곳이었어요.
배고프고 서럽고 풍족하지도 못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렇게도 그립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 시절, 왜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가끔 사무칠 정도로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추억의 시간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MZ 세대에게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제게는 생각만 해도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그런 추억이고 그리운 이야기랍니다. 그럼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콩나물 시루 같던 교실, 그 속의 따뜻한 추억

197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로 그 인원수였어요. 한 반에 무려 70명, 많게는 80명까지도 앉아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떻게 그 좁은 교실에 그 많은 아이들이 다 들어갔나 싶죠.
그래서 2부제 수업도 있었어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했는데, 한쪽 아이들이 하교할 때 다른 아이들은 등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어도 정말 질서정연했다는 거예요.
삐걱삐걱 나무 책걸상의 추억
그 시절 교실 가구라고 해봤자 나무로 만든 책걸상이 전부였어요. 앉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 구멍이 뚫려 있었죠.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 누런 공책에 꾹꾹 눌러가며 글씨를 쓰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그런데 정말 웃긴 건, 가끔 의자 다리가 부러지거나 책상이 기울어져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그럴 때면 선생님이 "야, 너 또 의자 부러뜨렸냐?"라고 하시는데, 억울하기도 하고 그랬답니다.
난로 위 도시락, 그 향긋한 추억의 냄새

그 시절 가장 설레던 시간 중 하나가 바로 점심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처럼 급식이 있던 게 아니라, 모두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어야 했거든요. 겨울이면 도시락이 꽁꽁 얼어서 딱딱해지니까, 교실 가운데 있는 난로 위에 쌓아놓고 데웠어요.
그래서 발 빠른 아이가 맨 밑에 자기 도시락을 놓을 기회를 얻었죠. 맨 밑에 놓인 도시락에는 맛있는 누룽지가 만들어져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했답니다. "네 도시락만 아래 놓으면 어떻게 해? 나도 누룽지 먹고 싶단 말이야!"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어요.
조개탄 난로와 연통의 추억
그 시절 교실 난방은 전부 조개탄 난로가 맡고 있었어요. 도시에서는 조개탄을, 시골에서는 나무를 때서 교실을 따뜻하게 했죠. 난로 주변에 앉은 아이들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고, 창가 쪽에 앉은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난로 곁으로 몰려들었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건, 당번이 되면 창고에서 조개탄을 가져와야 했는데, 그게 정말 무겁더라고요. 리어카를 끌고 가서 조개탄을 받아오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양은 도시락 속 소박한 반찬들

그 시절 도시락이라고 해봤자 정말 소박했어요. 대부분 김치와 단무지 정도가 반찬의 전부였고, 계란말이나 멸치볶음, 소시지, 장조림을 싸오는 아이는 부잣집 아이라고 여겨졌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박한 반찬들이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맛있었어요. 다시는 그런 맛을 느낄 수가 없겠죠. 그건 음식의 맛이 아니라 추억의 맛이니까요.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도시락을 꽁꽁 싸매고, 수저를 그 사이에 쿡 찔러 넣어서 가방에 반찬 국물이 흐르지 않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가끔 고무밴드가 벗겨져서 가방에 김치국물이 흘러내려 교과서와 공책에 배어버리기도 했죠. 그 때 나던 그 시금털털한 냄새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정말 코 앞에서 맡아지는 것처럼 눈물이 확 날 정도로 그립습니다.
아버지 월급날이면 도시락이 예쁜 색들로 채워졌어요. 가끔 계란이 밥 위에 올려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아버지가 월급봉투를 가져오신 날 이후였던 것 같아요. 그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몰라요.
보리밥 검사와 혼분식 장려
그 시절에는 쌀이 부족해서 정부에서 보리와 쌀을 섞어 먹도록 장려했어요. 학교에서도 그걸 잘 지키고 있는지 검사를 했는데, 쌀밥을 싸온 친구들은 도시락에 있는 보리밥을 재빨리 자기 도시락에 숨기기도 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수했던 시절이에요.
학교종이 땡땡땡, 그 친숙한 멜로디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차임벨이나 방송이 아니라, 진짜 구리로 만든 작은 종을 손으로 쳐서 수업 시간을 알렸어요.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그 노래처럼 말이죠. 수업 시작할 때는 세 번, 수업 끝날 때는 두 번, 운동장으로 모일 때는 다섯 번 쳤답니다.
그런데 화재나 비상사태 때는 연속으로 쳤어요. 그 종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나네요. 1970년대 이후에는 방송 시설이 발달되면서 이런 종소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의 가슴속에 그 멜로디가 남아 있을 거예요.
국민교육헌장과 반공교육의 시대

그 시절에는 모든 국민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어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그 긴 문장을 모두 외워야 했죠. 교과서 앞머리에도 항상 실려 있었고, 각종 시험에도 나왔으니 피할 길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6월이 되면 학교에서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웅변대회 등이 열렸어요. 아이들은 '무찌르자 공산당'으로 시작되는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하기도 했고, 북한 사람들을 그리라고 하면 뿔 달린 도깨비로 그리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어요.
똘이 장군과 교련 수업
그 시절에는 '똘이 장군'이라는 영화를 학교에서 함께 보기도 했어요. 공산당을 무찌르는 활약을 펼치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시대적인 영화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 가면 교련 시간도 있어서 총 쏘는 훈련도 받고, 응급 상황에 대비해 붕대 감는 방법도 배웠답니다.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그 시절 국민학교에는 지금의 교과목과는 좀 다른 과목들이 있었어요.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이 바로 그것이었죠. 1982년에 만들어진 이 과목들은 각각 도덕, 사회, 과학, 예체능 교과의 초등교육 과정을 제공했어요.
처음에는 바른 생활이 도덕과 국어, 사회를 통합한 과목이었고, 슬기로운 생활은 산수와 자연, 즐거운 생활은 음악, 미술, 체육을 통합한 과목이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재미있는 과목 이름들이었어요.
그리고 남학생들이 가정 관련 내용을, 여학생들이 기술 관련 내용을 배운 첫 세대이기도 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진보적인 교육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런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손수건과 신주머니, 그리고 책보자기

그 시절 국민학교에 입학하면 1학년 학생들은 모두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다녔어요. 코흘리개가 많아서 휴지 대신 이용하라고 달아준 거였죠. 신발은 대부분 고무신이었고, 가방이 없는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춤에 차고 학교에 다녔답니다.
그 시절 추억의 책가방도 참 특별했어요. 여러 권의 교과서와 함께 도시락이 자리 잡고, 뒤쪽에는 신발주머니도 넣고 다녔죠. 도시락 반찬 국물이 흘러서 가방 한구석이 얼룩지고, 무거워서 한쪽 어깨가 처지는 건 기본이었어요.
표어 명찰과 각종 행사들
그리고 원호의 달, 불조심, 쥐를 잡자, 민방위의 달, 저축의 달, 산불조심 등 계몽 표어를 이름과 함께 달고 다녔어요. 그때는 저축의 날도 있어서 "내 집 위해 저축, 나라 위해 저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꼬박꼬박 저축을 하곤 했답니다.
문방구 앞의 추억과 간식거리들

그 시절 아이들의 낙원은 바로 문방구였어요. 라면땅, 자야 등은 대표적인 군것질거리였고, 여름에는 동네 구멍가게나 문방구마다 고무뚜껑이 달린 보온통에서 하드를 팔았죠. 밑에 것을 잘못 사먹으면 소금이 섞인 얼음물이 하드에 배어 짠맛의 하드를 먹곤 했어요.
그리고 설탕이나 사각 포도당에 소다를 넣고 대나무 작대기로 휘휘 저어 빨아먹던 일명 '오리떼기'도 있었죠. 달고나도 그때부터 있었는데, 사람 모양이나 비행기 모양을 그대로 맞추면 하나 더 얻을 수 있어서 바늘에 침을 발라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양을 맞추곤 했답니다.
예방주사와 구호급식의 추억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예방주사를 맞곤 했어요. 주사를 맞는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진 아이와 달리,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욱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죠.
그렇기에 1953년부터 시작된 구호급식도 있었어요. 미국의 구호단체 CARE로부터 원조받은 옥수수가루로 만든 옥수수빵, 옥수수죽이 급식으로 제공되었는데, 한 반에 배당되는 빵의 양이 정해져 있어서 날짜마다 차례를 정해 나눠주었답니다. 자기 차례가 오지 않아 빵을 받지 못한 아이는 시무룩해하곤 했어요.
그 시절, 그 따뜻했던 추억들
이렇게 1970년대 국민학교의 추억을 되돌아보니,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참 따뜻했던 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네요. 난로 위에서 데워진 도시락의 따뜻함,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던 소박한 간식들, 그리고 선생님의 사랑 어린 눈빛까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때보다 훨씬 좋은 환경과 시설이 주어져 있지만, 과연 그때만큼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때로는 불편하고 부족했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던 인간적인 정과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건 저뿐만이 아니겠죠?
오늘 이렇게 추억을 나누다 보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네요. 비록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때의 따뜻한 마음만은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추억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인생의 고마움이자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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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의 끝에서, 문득 “1970년대 국민학교에 다니던 꿈을 50년 만에 다시 꾼 날”이 떠오르셨다면 그 시절 문방구 앞에서 사 먹던 추억의 옛날과자·불량식품으로 마음 한켠을 살짝 달래보셔도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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