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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소개

진실은 불타고, 우리는 해답이 아닌 불씨를 쫓는다! 영화 "버닝" 상징과 해석

by K-Movie 아카이브 2025.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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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주연의 영화 "버닝" 포스터
이창동 감독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주연의 영화 "버닝" 포스터

 

 

영화를 보고나서 한 동안 머리가 하얘졌다고 해야 할까요? 공포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마음 속에 두려움과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머릿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감독의 이전 작품인 "밀양"과는 또 다른 차원의 미스터리함이 머릿 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며 영화 속에 감추어진 은유나 상징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내려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지며 다른 사람의 리뷰를 읽는다거나 영화 관련 정보를 더 찾아본다거나 하여튼 제게는 그 어느 영화보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을 파헤쳐 보려는 즐거움을 준 영화가 바로 "버닝"이었습니다.

영화 "버닝"은 2018년 5월 17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작품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한 미스터리 드라마입니다. "시" 이후 8년 만의 복귀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세 배우의 인상 깊은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이후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과 벌컨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소개되었고, 특히 북미에서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예비 후보에 오르며 한국 작가주의 영화로서 드문 주목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총 관객 수 52만 8천여 명을 기록하며 흥행 면에서는 제한적이었으나, 해외에서는 미학적 완성도와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아 메타크리틱 91점, 로튼토마토 신선도 95% 등 평단의 압도적인 찬사를 얻었습니다.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관객의 해석을 유도하는 이 영화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의문과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버닝"의 줄거리 및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과 주요 감정선, 그리고 감춰진 미스터리적 요소들을 재조명 해보고자 합니다. 글을 정리해 가면서 제가 그 동안 궁금해 했던 것들도 같이 좀 풀려 나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라진 것은 고양이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진실 그 자체일까 - 줄거리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택배 상자를 나르는 일을 하고 있는 이종수(유아인 분)는 어느 날 배달 도중 우연히 경품 추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손목시계에 당첨됩니다. 그 시계를 건네주는 여성은 그에게 다정하게 묻습니다. “여자친구 있으세요?” 종수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웃으며 말합니다. “이거 여자용 손목시계인데, 이제 여자친구를 구하셔야겠네요?” 그리고 돌아서 가려던 종수에게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나, 너 어릴 때 동네에서 같이 놀던 해미야.” 그렇게 종수는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녀는 바로 신해미(전종서 분)입니다.

종수는 해미와 짧은 재회를 통해 다시금 삶의 어떤 중심을 찾아가려는 듯 보입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해미가 보여주는 팬터마임을 보며 웃기도 하고, 고양이 ‘보일’을 잠시 맡아 달라는 부탁에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해미는 그에게 아프리카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며 그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종수는 고요한 그녀의 원룸에 들러 고양이를 찾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해미는 “자폐가 있어서 낯선 사람 앞에선 안 나와”라고 설명하지만, 고양이의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이 모호한 상황은 곧 영화 전체에 드리우는 불확실성의 그림자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녀 곁에는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낯선 남자가 함께합니다. 겉보기엔 부유하고 세련된 벤. 하지만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차가움과 무심함이 종수에게 불편한 인상을 남깁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말고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는 벤의 말은,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벤은 종수에게 “곧 한 채의 비닐하우스를 태울 계획이다”라고 은유적인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비닐하우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벤이 말하는 ‘불태움’은 무언가를 버리고 지우고 없애버리는 그의 방식입니다. 종수는 점점 해미와의 거리, 그리고 벤과의 불균형 속에서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미와 벤이 종수의 시골집을 찾아 오게 되고, 거기서 술과 마약을 같이 한 해미는 시골집 마당에서 상반신을 벗고 춤을 춥니다. 아프리카에서 배운 춤이라며 새처럼 팔을 펴고 노을 아래 몸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외로움과 절망의 몸짓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이, 종수가 해미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됩니다.

이후 해미는 연락이 두절됩니다. 전화는 꺼져 있고, 집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해미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도 더 종수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도 그녀의 부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종수는 점차 벤에 대한 불신을 키워갑니다. 벤의 집에서 해미의 고양이로 보이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보일아’ 하고 부르자 고양이가 종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고, 이제 종수의 눈빛은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 보입니다. 해미의 핑크색 손목시계와 같은 모델의 시계가 벤의 서랍 안에 있는 것도 더더욱 종수의 확신을 부추기게 합니다. “해미는 그냥… 연기처럼 사라졌어요”라는 벤의 말은, 끝없는 의심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찰나의 결정타가 됩니다.

결국 종수는 자신의 감정을 소설로 표현하는 대신,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종수는 벤을 외딴 시골로 유인해 그를 단검으로 찌릅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있는 차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뒤, 자신의 피 묻은 옷까지 모두 벗어 불 속에 던집니다. 알몸이 된 채 트럭에 올라탄 종수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무언가를 태워 없애고, 다시 태어나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선언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불이었는가, 욕망이었는가 - 영화 "버닝" 상징과 해석

 

영화 "버닝"은 결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영화입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허구인지, 누구의 말이 사실이고 누구의 시선이 왜곡된 것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불분명함 속에서 관객은 각자 자신만의 해석을 세우게 됩니다. 그 해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보는 진짜 묘미이자, 감독이 의도한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영화 전체가 종수의 소설 속 이야기?

가장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은, 영화 전체가 어쩌면 종수의 소설 혹은 상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나왔지만 글을 쓰지 못하고 택배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해미가 사라진 후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시점부터 영화는 인물의 시선과 구도가 달라지고, 벤의 사생활을 종수가 아닌 제3자의 시선에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창틀을 프레임 삼아 종수를 액자 속에 가둬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 이 이야기가 종수의 내면 세계 혹은 상상의 일부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해석대로라면, 영화의 말미에서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불태우는 장면은 현실의 응징이 아니라, 종수의 상상 속 정의 구현일 수도 있습니다. 종수가 해미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해미가 사라진 후 그를 둘러싼 모호함과 분노는 그의 내면을 불태우고, 그는 자신만의 결말을 상상으로라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영화는 현실과 상상, 진실과 거짓, 기억과 망상의 경계선에서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종수는 왜 소설을 쓰게 되었나?

종수는 영화 초반부부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세상은 수수께끼이고, 명확한 진실이나 질서를 발견할 수 없는 혼란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해미의 실종, 벤과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동은 결국 종수로 하여금 자신 안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종수가 글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내면의 불확실함과 분노, 슬픔을 정리하는 자기 치료이자 정체성 확립의 과정입니다. 결국 그는 비로소 쓸 이야기를 찾게 되었고, 그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현실과 초월의 경계선에서 해미의 존재 유무

또 하나의 핵심 해석 포인트는 해미의 존재와 그녀가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해미는 존재 자체가 마치 팬터마임처럼 실체 없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녀가 키운다는 고양이는 끝내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어릴 적 우물에 빠졌다는 기억도 주변 인물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미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허구 속에서도 진실을 갈망하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해미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도 자유를 꿈꾸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납니다. 그녀의 팬터마임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상상으로라도 부족한 현실을 채우려는 절박한 몸짓이자 저항의 표현입니다. 해미는 사라졌고, 그녀의 흔적은 모호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살일 수도, 단순한 가출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해미는 마지막까지도 자유를 갈망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미는 현실과 초월의 경계선에서, 오롯이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살아낸 인물로 남습니다.

 

다층적인 상징과 구조의 미로 속으로 

표면적으로는 청년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이라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현대 사회의 계층 불균형, 젊은 세대의 상실감, 불안정한 정체성과 같은 다층적인 상징들이 교차됩니다. 종수는 투명한 존재처럼 다뤄지며, 해미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현실에 갇힌 인물로 묘사되고, 벤은 모든 것을 소유한 듯하지만 기이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속 ‘온실을 태운다’는 벤의 대사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은유적으로 지우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종수가 느끼는 분노와 불안은 관객에게 전이되며, 영화의 말미로 갈수록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이런 모호한 서사는 관객 스스로 판단하고 해석하게 만드는 힘을 갖게 합니다. 

 

고양이 보일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있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 유명한 양자역학 태동기에 나온 방정식에서 따온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죽음과 삶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데 천재 리처드 파인만도 말했듯이 아무도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해미가 말한 고양이는 그 존재 자체가 모호합니다. 아울러 해미의 고양이 이름이 보일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죠. 고양이 이름을 보일이라고 하게 된 이유가 단순하게 나오지만 보일의 어원은 ‘보일러’이자, '분노가 끓다(boil)'의 이중적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비닐하우스는 태워질 수 있는 모든 것, 즉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을 ‘하찮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종수는 이 투명하지만 내부는 보이지 않는 구조물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가 어쩌면 해미를 의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 분노의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수가 아버지의 칼을 꺼내 들었을 때, 그것은 곧 세대 간의 분노가 대물림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오래된 창고 속 금고 안에서 종수가 칼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마도 종수 내면에 꽁꽁 감추어져 있던 분노와 폭력성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우물은 기억과 허구, 그리고 삶의 진실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우물이, 종수가 듣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나중에 회복되며 현실화됩니다. 아마도 세상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들리고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벤은 살인자일까요?

벤은 영화 내내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늘 태연하고 친절하지만, 그 친절 속엔 공허함과 권태, 그리고 일종의 위악적인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는 재미와 흥미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듯한 언행을 보입니다.

그가 정말로 해미를 죽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벤은 하나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의인화한 존재로도 해석됩니다. 종수가 벤을 죽인 것은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상징적인 저항일 수 있습니다. 실지로 종수가 벤을 죽였는지 안죽였는의 진실 여부보다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는 종수가 끝내 자신만의 답을 내렸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해주는 듯 합니다. 

 

감정선의 교차, 무력감과 불안의 감정 흐름

‘버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요소 중 하나는 세 인물 간의 감정선입니다. 종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지만 내면의 혼란과 분노는 점점 쌓여 갑니다. 해미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며,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시선을 보입니다. 벤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감정이 결여된 듯한 섬뜩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 감정의 흐름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잔잔하게, 그러나 깊게 깔려 있습니다.

특히 해미가 춤추는 장면은 그 상징성이 매우 큽니다. 해는 지고, 음악은 흐르고, 그녀는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자유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느끼는 무력감의 절규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의 감정을 흔들고, 각자의 경험에 따라 해석될 수 있게 만듭니다. 감독은 이러한 감정선을 통해 사회적 감정, 특히 청년층의 허탈감과 공허함을 그려냅니다.

 

미스터리를 체험하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영화 "버닝"이 특별한 이유는 명확한 결말 없이 끝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미의 실종, 벤의 정체, 종수의 행동 등은 영화 속에서 모두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으며 의도적으로 많은 부분을 생략합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스스로 상상하고 추리할 수 밖에 없게 되며, 이러한 서술 방식은 영화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더욱 강화합니다.

벤이 실제로 사람을 죽였는지, 해미는 자살했는지, 종수는 진실을 알았는지… 이런 질문들이 남겨진 채 영화는 끝나며, 관객은 불편하지만 강렬한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단순한 스릴러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실체 없는 공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감독은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러한 방식은 "버닝"을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해석 가능한 텍스트로 만듭니다. 이 영화는 반복해서 볼수록 새로운 의미가 보이고, 그 안에서 관객은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에는 영화 "버닝"은 관객에게 퍼즐을 쥐어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퍼즐은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때로는 조각조차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실제로, 진실은 존재하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현실을 대하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미스터리를 마주하고, 어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며, 때로는 자신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종수는 그런 혼란과 분노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답을 찾고, 그 결론이 맞든 틀리든 행동에 옮깁니다. 그렇게 그는 '베이스를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세상의 진동에 반응하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어쩌면 이것일지 모릅니다. 세상은 수수께끼고, 진실은 늘 모호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 "버닝"은 그 미스터리한 삶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며,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럼 두서없는 글 읽으시랴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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