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상이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였다."
—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이 기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피식 웃음이 났어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자격루를 만들고, 4군 6진으로 북방 영토를 개척한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그런데 그분이 고기 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으셨다니요? 왠지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단순한 일화가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의 '육식 사랑'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고, 그 식습관이 그분의 건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들여다보면, 555년 전 조선 궁궐 수라간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식탁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오늘은 철저하게 실록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의 육식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재위 32년간 그 방대한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를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직접 증언하는 세종의 육식
세종대왕이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종실록에는 '육선(肉饍, 고기 반찬)'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서 '육선'을 검색하면 세종 시절 관련 기록이 유독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가장 직접적인 기록은 세종실록 2년(1420년) 8월 29일 자에 등장합니다. 당시 신하들이 상중(喪中)에도 고기 반찬을 올려야 한다고 청하면서 남긴 말이었습니다.
"전하께서 평소 고기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 채식)한 지도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됩니다. 신 등이 오늘 청하는 것도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한 것입니다." —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신하들이 직접 "고기 없이는 수라를 못 드신다"고 왕에게 아뢰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세종의 육식 편애는 궁중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어요. 하루에 4끼를 드셨다는 기록도 있고, 수라상에 고기 반찬이 없으면 아예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여러 기록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극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승하하기 직전 남긴 유언입니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몸도 비중(肥重)하니 내가 죽은 뒤 상중(喪中)에도 고기를 먹게 하라." — 태종의 유언 (세종실록 4년 5월)
임금 아버지가 죽어가면서도 아들 걱정에 "상중에도 고기 꼭 먹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 이쯤 되면 세종대왕의 육식 사랑이 단순한 취향을 넘어 일종의 '체질적 의존'에 가까웠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육식은 즐겼지만… 운동은 철저히 싫어했다
세종대왕이 고기를 즐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조합은 현대 의학적으로도 위험 신호입니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방 안에 앉아 책 읽기를 즐겼습니다. 격구(擊球)나 사냥 같은 야외 활동을 즐겼던 태종, 태조와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어요. 그래서 태종이 상왕 시절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몸이 뚱뚱하시니 함께 사냥하며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걱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세종이 즐긴 유일한 운동에 가까운 활동은 '격방(擊棒)'이라는 조선식 골프와 유사한 놀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격렬한 유산소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결국 고칼로리 육식 + 운동 부족 + 극심한 과로와 수면 부족이라는 삼중고(三重苦)가 세종의 몸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세종은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신하들이 잠든 후에도 촛불을 밝히고 문서를 검토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신숙주가 경연 중 잠들었을 때 세종이 직접 옷을 덮어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 시각에 왕이 잠도 안 자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세종대왕의 몸을 덮친 질병들 — 실록이 기록한 '종합병원'
육식과 운동 부족이 쌓인 결과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앓은 질병이 놀라울 만큼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소갈증(消渴症)이 생겨 하루에 마시는 물이 한 동이가 넘었다. 지금은 또 눈병이 나서 오래 일을 보지 못하니 정사(政事)가 해이해질 것이 두렵구나." — 세종실록 1439년
소갈증(消渴症). 오늘날의 당뇨병에 해당하는 질환입니다. 몸속 체액이 소모되어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해소가 되지 않는 증상이에요. 현대 당뇨 환자의 3대 증상인 다음(多飮, 물을 많이 마심)·다식(多食, 많이 먹음)·다뇨(多尿, 소변이 잦음)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세종의 질병 목록은 당뇨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 1439년 기록에는 한 번에 열거된 질병만 해도 당뇨(소갈), 두통, 이질, 다리 부종, 수전증(手顫症, 손 떨림), 풍질(風疾), 임질(淋疾, 당시 요로 계통 질환을 이르는 용어) 등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말년에는 한 걸음 앞의 사람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을 잃었어요. 가장 사랑했던 책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세종을 가리켜 '앉아 있는 종합병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질환의 종류도 많았고, 고통도 극심했어요. 그럼에도 세종은 시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완성했고, 수전증에 시달리면서도 신하들과 밤새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54년을 살았을까? — 조선 왕실의 의료 시스템
자,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이렇게나 많은 질병을 안고 살았던 세종대왕이 어떻게 54세(재위 32년)까지 살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조선 왕실의 탁월한 의료 시스템인 '내의원(內醫院)'의 존재입니다.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건강을 전담하는 궁중 의료기관으로,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어의(御醫)들이 항시 대기하며 왕의 상태를 세밀하게 관리했어요. 세종의 병증 하나하나가 실록에 상세히 기록된 것도 어의들이 매일 왕의 상태를 진단하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세종은 안질(眼疾) 치료를 위해 직접 온양온천(현재 충남 아산)을 행차하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1442년 온양에 행차하면서 그 지역의 이름을 '온양군(溫陽郡)'으로 개칭했다고 합니다. 당시 온천욕은 관절통, 피부 질환, 안질 등에 유효한 치료법으로 인식되었어요. 세종이 국왕의 신분으로 치료를 위해 직접 먼 길을 나선 것 자체가, 그만큼 병세가 심각했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단백질 중심 식단의 역설적인 측면입니다. 15세기 조선의 평균적인 백성들은 대개 채식 위주의 열악한 식단으로 영양 불균형에 시달렸습니다. 그에 비해 세종의 육식 위주 식단은 단백질 공급이 풍부했고, 빈혈이나 영양 결핍 같은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현대 영양학 관점에서 세종의 식단이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시대적 맥락에서는 단백질 섭취 자체가 면역력과 체력 유지에 기여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에게는 강철 같은 정신력이 있었습니다. 소헌왕후를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을 연달아 잃으면서도 세종은 국정을 놓지 않았어요. 몸은 병들어 가고 있었지만, 일에 대한 의지와 백성을 향한 책임감이 그를 버티게 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세종의 식단을 현대 의학으로 해석한다면?
현대 영양학과 의학의 관점에서 세종의 삶을 재해석해보면 이야기가 한층 흥미로워집니다.
세종의 식패턴 — 고칼로리 육식, 운동 부족, 극심한 수면 부족, 정신적 과부하 — 은 현대 의학이 '대사증후군(Metabolic Syndrome)'의 전형적인 원인으로 꼽는 요소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비만, 고혈당(당뇨), 고지혈증, 고혈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대사증후군이지요.

세종이 앓았다고 추정되는 소갈증(당뇨), 부종, 풍질, 시력 저하는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제2형 당뇨병과 그 합병증으로 설명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세종의 말년 통증이 당뇨 합병증인지, 아니면 강직성 척추염(Ankylosing Spondylitis) 때문인지에 대해 아직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요. 확정적인 진단 없이도 세종이 극심한 통증 속에서 재위 마지막 해까지 국정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한편, 세종이 즐겼다는 '영계백숙'도 흥미롭습니다. 위키백과 관련 기록에 따르면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흰 수탉을 먹어 혈당을 낮췄다는 기록도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 식의(食醫, 음식으로 병을 치료함)의 개념이 궁중에서 실제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은 이미 1460년대에 최초의 식이요법서인 『식료찬요(食療纂要)』를 편찬할 만큼, 음식과 건강의 관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어요.
병들어가면서도 훈민정음을 완성한 세종 — 의지의 기록
세종의 이야기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대목은, 그가 가장 몸 상태가 나쁜 시기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다는 사실입니다.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창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세종의 눈병이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어, 문서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어 있던 때입니다. 말년인 1442년부터는 왕세자 문종이 대리청정을 논의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세종은 새로운 문자 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종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밤새 토론하고, 수정하고, 다시 검토하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수전증으로 손이 떨렸어도, 눈이 흐릿해졌어도,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런 세종의 모습은 단순히 '위인전 속의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해나가는 사람의 이야기예요. 어쩌면 세종의 건강을 지탱한 가장 강력한 힘은 어의의 처방도, 온천욕도 아니라 바로 이 '목적의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1450년(세종 32년) 음력 2월 17일, 세종대왕은 영응대군의 사저 동별궁에서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재위 32년,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운영, 측우기·자격루·앙부일구 발명, 4군 6진 개척, 공법(貢法) 개혁, 『농사직설』 편찬… 그 모든 것이 질병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식탁이 우리에게 남긴 것
세종대왕이 육식을 즐겼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직접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식습관이 당뇨를 비롯한 여러 질병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실이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 이야기에서 묘한 위안을 느낍니다.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군주도 고기 없이는 수저를 못 들었고, 몸이 아파도 일을 놓지 못했고, 그러면서 인류에게 지금도 살아 있는 유산을 남겼어요. 완벽한 건강과 완벽한 식단을 갖추지 않아도, 사람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이것만큼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종의 삶은 '육식이 문제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육식과 운동 부족과 과로가 겹쳤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세종이 54세에 생을 마감한 것은 당시로서도 이른 나이였어요. 현대인의 평균 수명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555년 전 조선의 수라간에 가득했던 고기 냄새를 상상하며, 오늘 우리의 식탁을 한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세종대왕도 몰랐던 것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요.
📚 참고 자료 및 출처
-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국사편찬위원회) — https://sillok.history.go.kr
- 우리역사넷 — 세종 (국사편찬위원회) — https://contents.history.go.kr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인물 이야기 (문화재청) — https://sejong.cha.go.kr
- 이기환의 Hi-story — 세종, 임질에 걸렸다고 고백 (경향신문) — https://www.khan.co.kr
- 세종대왕이 이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서울경제) — https://ww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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