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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삶이란 무엇인가 - 어느 허접한 인간의 짧은 일탈의 가벼움

by K-정보 아카이브 202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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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 삶의 의미를 상징하는 고대 철학자 이야기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표작 '소크라테스의 죽음(The Death of Socrates)'. 소크라테스가 진리에 대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배를 마시는 순간을 그린 명화로, 삶과 철학의 본질을 묻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이 주제 자체를 논한다는 자체가 실제로 무의미 하지 않을까 싶네요.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삶이 의미가 없다라고 결론이 난다 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질 것이 아니라면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는 자체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아마도 이 질문을 던지는 자기 자신에게 답이 있을 듯 합니다. 어쩌면 그래도 살아 보려는 강한 욕구와 의지가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 숨어 있기에 삶의 의미를 캐물으려 하는 건 아닌지...그래서 이 글에서는 저보다 훨씬 현명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며 또한 진정한 삶의 지혜를 진지하게 찾으려 노력했던 많은 사상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보잘 것 없는 제 수준에서나마 다시 한번 가다듬고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 위한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쓰는 글을 통해 스스로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라는 인간이 지닌 비굴한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질문도 그 질문을 하는 시간 자체가 길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가볍고 또 다시 가볍고..참을 수 없을 만큼의 가벼움을 지닌 속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순하지만 무거운 질문에 대해,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했습니다.

 

맨 처음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해 볼까요.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글을 남기지 않았고, 주로 제자 플라톤의 기록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며,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는 문답법(산파술)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권위와 전통에 도전했던 그는 결국 신을 부정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자발적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삶 자체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증명한 인물인 소크라테스가 삶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아테네의 광장에서 사람들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던 이 철학자는,
삶이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인간'이란, 질문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에 와서야 저는 저 자신에게 질문을 참 많이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육신의 쾌락에 젖어 있던 동안에는 제 자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저는 배부른 돼지였던 것이죠. 숨만 쉬고 있었을 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은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플라톤은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는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고 말했죠.

플라톤(기원전 428~348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죠. 그는 서양 철학과 정치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철학, 윤리, 정치, 형이상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국가』, 『향연』, 『변명』 등이 있으며, 대부분 대화체 형식으로 스승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철학적 주제를 탐구합니다. 그는 이데아론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완전한 진리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아테네 근처에 세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플라톤은 철학을 단순한 이론이 아닌, 정의로운 삶을 위한 실천의 길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정말 허상인 것인가요?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진정한 삶이란 이데아, 즉 진리의 세계를 향해 영혼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죠. 
삶이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가는 긴 항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더 실용적이었습니다.

그는 행복(eudaimonia)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봤습니다.
그 행복이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이성과 덕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삶이었죠.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곧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은 제게 위안이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늘 자기만족이야 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아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란 제가 늘 생각해 왔던 자기만족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노인을 위한 봉사 활동에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정말 많이 기울인다고 칩시다. 남들이 볼 때에는 그럴 시간에 자신을 위해 더 시간과 애정을 쏟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사자는 아마도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노인 봉사를 열심히 하는 그 분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와 수고 자체에 자기 만족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자신이 불만족스러운 그 봉사 행위를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 모든 사람은 매 순간 다른 선택의 상황 하에서 가장 자기 만족을 향하는 쪽으로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책상에 오래 앉아 지겨운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충분히 참고 견딜만 하다고 선택하는 그 사람의 결정에서 오는 것이고, 결국 그 결정은 그 자신의 자기 만족을 따른 것이라고 말이죠. 비약이 지나쳤나요?

 

저는 정말 가볍습니다. 이 무거운 주제로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벌써 지쳐서 눕고 싶습니다. 왜 내가 갑자기 이 순간에 무슨 인생의 깨달음을 얻으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었을까? 잠시 미친 건가? 

 

아마도 저는 지금 자리에 누우려 이 글을 끝내지만은 내일 아니면 모레 하여튼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또 다시 삶의 의미를 궁금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볍고 또 가벼운 사람이기 때문이며, 생각이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속물이기 때문입니다. 애드센스 수익을 바라고 블로그를 무턱대고 시작하고, 챗gpt로 글을 도배했지만 제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인 듯 합니다. 속이 조금은 후련합니다. 두서없는 스스로의 반성문인지 어느 미친 인간의 넋두리인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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