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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엔 없는 고려시대 충격 실화 5가지 – 알면 알수록 황당한 역사

by 아카이브지기 2026.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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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29명? - 태조 왕건의 기상천외한 결혼 전략

태조 왕건 즉위식의 상상도
태조 왕건 즉위식의 상상도

 

역사책에서 태조 왕건은 늘 '위대한 통일 군주'로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 위대함의 이면에는 정말 황당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왕건의 부인이 무려 29명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어안이 벙벙할 숫자지만, 이것은 단순한 호색(好色)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유력 호족 집안 딸들을 차례차례 부인으로 맞아들이면서, 끊을 수 없는 혈연의 끈을 맺는 태조 왕건
전국의 유력 호족 집안 딸들을 차례차례 부인으로 맞아들이면서, 끊을 수 없는 혈연의 끈을 맺는 태조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전국 각지에 흩어진 강력한 호족(豪族)들이었어요. 이들은 각자의 군사력과 재력을 가진 사실상의 지방 권력자들이었고, 자칫하면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왕건이 선택한 해법은 바로 혼인이었어요. 전국의 유력 호족 집안 딸들을 차례차례 부인으로 맞아들이면서, 끊을 수 없는 혈연의 끈으로 이들을 왕실에 묶어놓은 겁니다.

 

왕건의 29명 부인들과 이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25남 9녀, 총 34명.
왕건의 29명 부인들과 이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25남 9녀, 총 34명.

 

실제로 『고려사』 「후비전」의 기록을 보면, 왕건의 29명 부인들은 전국 각지의 대표적인 유력 가문 출신이었어요.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지역만 봐도 한반도 전체를 아우릅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25남 9녀, 총 34명. 현대의 어떤 드라마도 따라가지 못할 규모의 대가족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더 황당한 반전이 있습니다. 호족의 딸이 임신을 하지 못하거나 딸만 낳았을 경우, 왕건은 그 여성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나라를 세우는 일이 이토록 냉정했다는 것, 역사는 가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이복남매끼리 결혼? - 고려 왕실의 근친혼이 공식 풍습이었다

왕실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외부 세력이 왕위 계승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복남매끼리 혼인을 하는 모습
왕실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외부 세력이 왕위 계승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복남매끼리 혼인을 하는 모습

 

29명의 부인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면, 이 다음 이야기는 더욱 놀랍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왕실에서 이복 남매 간의 결혼이 버젓이 이루어졌어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은 당시 고려 왕실이 의도적으로 채택한 정책이었습니다. 왕실 혈통을 순수하게 유지하고, 외부 세력이 왕위 계승에 끼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지요. 왕건 스스로가 29명의 부인에게서 수십 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이 왕자와 공주들이 서로 결혼하는 것이 왕실 입장에서는 오히려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졌던 겁니다. 위키백과 근친혼 항목과 우리역사넷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에는 이복 남매 사이의 혼인까지 행해졌으며, 일반 귀족 가문 사이에서도 4촌끼리의 결혼이 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인주 이씨 집안의 경우, 고려 중기에도 형제의 딸, 즉 조카와 결혼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예요.

 

4촌지간이지만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왕족의 이복남매
4촌지간이지만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왕족의 이복남매

 

그런데 이 풍습은 결국 스스로의 모순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문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4촌끼리 혼인한 집안의 자식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금지법이 등장하고, 숙종 때는 6촌까지 혼인을 금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법이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다고 역사학자들은 기록하고 있어요. 오랜 관습은 법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지요.

 

결혼하고도 남편 집에 안 간다? - 고려 여성의 놀라운 독립성

고려 시대에는 결혼을 해도 여성은 친정에 계속 살고, 남편이 처갓집에 와서 사는 방식이 행해졌다
고려 시대에는 결혼을 해도 여성은 친정에 계속 살고, 남편이 처갓집에 와서 사는 방식이 행해졌어요

 

고려 여성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진 유교적 여성상 때문에 우리는 '전통 한국 여성 = 억압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기 쉽지요. 그런데 고려시대는 전혀 달랐어요. 우리역사넷에 수록된 혼인 관련 자료에 따르면, 고려의 일반적인 혼인 풍속을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결혼을 해도 여성은 친정에 계속 살고, 남편이 처갓집에 와서 사는 방식이에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고려 문신 이곡(李穀)이 원나라에 올린 공녀 폐지 상소문에도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남자가 차라리 본가에서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는 게 고려 풍속이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고려시대에는 자녀를 호적에 기재할 때 아들딸을 구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올렸고,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과 딸이 거의 동등하게 분배받았어요.

 

고려 시대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재산 상속을 받는 모습
고려 시대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재산 상속을 받는 모습

 

딸도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이혼과 재혼도 사회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재혼하면 그 자손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이 생기는 걸 보면, 고려가 얼마나 달랐는지가 역으로 확인됩니다. 같은 한반도, 같은 민족인데 불과 몇 세기 만에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참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승려가 몽골 총사령관을 죽이다 - 처인성 전투의 믿기 어려운 실화

몽골의 2차 침입시 처인성으로 향하는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이와 몽골 군대의 모습
몽골의 2차 침입시 처인성으로 향하는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이와 몽골 군대의 모습

 

1232년, 몽골은 세계를 정복한 최강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입합니다. 2차 침입이었어요. 총사령관은 살리타이(撒禮塔), 당시 몽골에서도 손꼽히는 맹장이었습니다. 몽골군은 개경을 지나 한강 이남으로 거침없이 내려왔어요. 그리고 경기도 용인 인근의 작은 토성, 처인성(處仁城)에 이르렀습니다. 처인성은 정규 군인도 아니고 부곡(部曲)이라 불리는 천민 집단이 지키는 작은 성이었어요. 몽골군 입장에서는 통과 의례에 불과한 장애물이었지요.

 

고려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이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살리타이를 명중시켜 전사시키는 장면
고려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이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살리타이를 명중시켜 전사시키는 장면

 

그런데 이곳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집니다. 고려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이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살리타이를 명중시켜 전사시킨 겁니다. 몽골 침략군의 총사령관이 정규군도 아닌 승려의 화살에 쓰러진 것이에요. 우리역사넷과 위키백과의 고려-몽골 전쟁 항목에 따르면,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갑자기 사기를 잃고 철군을 단행했습니다. 세계 최강 몽골군의 2차 침입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김윤후는 21년 후인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충주산성에서 또 한 번 몽골군을 물리치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토록 두 번씩 극적으로 등장하는 승려 장군이 또 있을까요? 현실이 소설보다 더 황당한 순간이 바로 이런 때입니다.

 

딸을 승려로 만들어도 소용없었다 - 공녀의 비극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뽑히는 것을 막고자 자신의 딸을 승려로 만들기 위해 삭발을 하려는 아버지의 모습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뽑히는 것을 막고자 자신의 딸을 승려로 만들기 위해 삭발을 하려는 아버지의 모습

 

1259년, 고려는 30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마치고 강화(講和)를 맺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어요.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매년 막대한 공물과 함께 '공녀(貢女)', 즉 여성을 바쳐야 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공녀 관련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고대 이래 전례가 없는 방식이었어요. 원나라가 여성을 공식적이고 지속적으로 요구한 것은, 유목 민족으로서 여성을 전리품처럼 취급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공녀로 선발된 여성들은 원나라 황실이나 귀족에게 보내졌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이 때문에 고려 사회에는 딸이 공녀로 뽑힐까봐 서둘러 어린 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남양 홍씨 출신의 고위 관료 홍규(洪奎)는 딸이 공녀로 뽑히는 것을 막기 위해 딸을 승려, 즉 여승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출가하면 공녀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꼼수가 들통났고, 결국 홍규는 섬으로 귀양을 가야 했습니다.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은 고려의 타락한 권력자가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원나라 장군에게 자진해서 소개하는 장면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은 고려의 타락한 권력자가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원나라 장군에게 자진해서 소개하는 장면

 

역설적이게도, 권력 있는 집안에서는 오히려 딸을 공녀로 자진해서 보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원나라 평장(平章, 고위 관료) 아합마가 미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얻으려는 욕심에 스스로 딸을 공녀로 내놓은 인물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사람들은 그를 두고 "딸을 팔아 관직을 얻었다"며 손가락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시대의 비극은 때로 이토록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국가에서 대장경을 두 번 만든 이유 - 팔만대장경의 황당한 탄생 배경

1232년 대구 부인사. 거대한 몽골군의 방화로 인해 수많은 목판 경전들이 보관된 사찰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고 있다. 불타는 연기와 화염 속에서 고려의 소중한 초조대장경 목판들이 재가 되어 날아가는 참혹하고 절망적인 순간.
1232년 대구 부인사. 거대한 몽골군의 방화로 인해 수많은 목판 경전들이 보관된 사찰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고 있다. 불타는 연기와 화염 속에서 고려의 소중한 초조대장경 목판들이 재가 되어 날아가는 참혹하고 절망적인 순간.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이유를 제대로 아는 분은 많지 않아요. 사실 고려는 팔만대장경 이전에 이미 한 번 대장경을 만든 나라입니다. 현종 때 만들어진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 그것이에요. 그런데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앞서 이야기한 처인성 전투가 있던 바로 그해에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어 있던 이 초조대장경이 몽골군의 방화로 모조리 불타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고려 조정이 한 행동이 흥미롭습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채 몽골군에게 육지를 내주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1236년에 새로운 대장경 제작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팔만대장경, 재조대장경(再彫大藏經)이에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의 여몽전쟁 항목에 따르면, 당시 고려 조정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겠다." 실제로 전쟁이 한창인 16년 동안, 81,258장의 목판에 글자 하나하나를 새겨 완성한 것이에요.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믿음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대장경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믿음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대장경

 

전쟁 중에 경전을 조각한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팔만대장경은 지금으로부터 800년이 지난 현재도 해인사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부처의 힘이 실제로 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집념과 정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분명히 세계가 인정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고려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나라였다

몽골의 침략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고려인들
몽골의 침략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고려인들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이야기들, 어떠셨나요? 왕건의 29명 부인, 이복남매 간의 근친혼, 결혼해도 친정에 사는 여성, 승려가 몽골 총사령관을 쓰러뜨린 전투, 그리고 전쟁 중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까지.

 

이 모든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라 『고려사』와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공식 역사 기록에 명확하게 남아 있는 실화들입니다. 고려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황당하고, 역동적인 나라였어요. 조선의 유교적 질서가 500년 동안 우리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그 이전 고려의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려는 세계 최강 몽골군에게 30년을 버텨낸 나라이고, 여성이 재산을 상속받고 재혼을 할 수 있었던 나라이며, 불교와 유교와 풍습이 뒤섞여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 나라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매력적이고, 알면 알수록 더 황당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이 글이 고려라는 나라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참고 출처 및 관련 링크

• 태조 왕건의 혼인 – 우리역사넷 : 바로가기
• 고려시대 혼인 풍속 (근친혼·서류부가혼) – 우리역사넷 : 바로가기
•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 – 우리역사넷 : 바로가기
• 비운의 공녀(貢女) – 우리역사넷 : 바로가기
• 근친혼 – 위키백과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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